‘같이’의 가치 Worth of ‘With’ (삼상 30:21-25)
- Chiheon Shin
- Aug 4, 2019
- 6 min read
주 안에서 사랑하는 시티센터교회 성도 여러분,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하면 뭐가 가장 많이 달라질까요? 그것은 무엇이든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연애를 할 때는 여전히 각자의 시간, 각자의 돈, 각자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무엇이든 ‘같이’ 하는 삶입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각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혼생활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배우자와 결혼을 결심하게 되지요?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좋을 때입니다. 같이 있는 것이 너무 좋아 이제는 더는 헤어지기 싫을 때, 결혼을 결심합니다. 연애할 때는 계속 같이 있고 싶더라도 때가 되면 각자 집으로 가야 합니다. 좋다고 같이 살 순 없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한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즉, ‘같이’의 가치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연합을 하고 싶어지고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1. 그러면 왜 우리는 ‘같이’ 있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 ‘같이’의 가치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것을 세 가지로, ‘창조, 구속, 성화’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각각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과 연결됩니다.
1.1. 먼저 창조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함을 보시고 돕는 배필을 지어주셨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인 존재로,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지음 받은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라고 하는 공동체 가운데 계십니다. 이 공동체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사랑받을 대상이 없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부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이’ 계셨고,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의 공동체로 존재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같이’ 존재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역을 ‘같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흔히 ‘창조 사역’ 또는 ‘창조주’라고 하면 성부 하나님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속 사역’이나 ‘구원자’라고 하면 성자 예수님만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하나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공동의 사역입니다.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닮도록,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같이’를 추구합니다.
1.2. 또한 구속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 즉 공동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실 때, 동시에 그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의 다른 지체들과 연결됩니다. 다른 형제자매들과 삶을 ‘같이’ 나누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personal) 받는 것이지만 결코 사적인(private)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라고 하는 공적인(public) 관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교회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열심히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관계는 맺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쪽짜리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동일하게 그분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는 다른 이들과 삶을 ‘같이’ 한다는 것,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1.3. 마지막으로 성화의 관점에서, 성경은 우리가 꼭 ‘같이’를 추구해야 한다,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은 이들은 바로 완전한 삶을 살게 되거나,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남아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거룩하게 변화됩니다. 이것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성화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이 성화를 공동체를 통해 이루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두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성화를 이루어가십니다. 싱글로 혼자 살 때보다, 배우자나 자녀들과 같이 살면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다툴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 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가족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더 거룩한 존재로 변화시키십니다. 성화를 이루어 가십니다. 나만 알고 내 맘대로 살았던 인생이 타인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됩니다.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서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공동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더욱 거룩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족이나 교회 안의 누군가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오히려 감사히 여기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공동체를 통해 여러분을 하나님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나를 거룩한 존재로 빚어 가시는 성령 하나님의 수단이자, 성화 학교(sanctification school)입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매우 소중합니다. 창조, 구속, 그리고 성화의 관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있도록 의도하신 분은 바로 삼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비록 불편한 게 많고, 문제도 갈등도 많지만, 우리는 ‘같이’ 있기 위해 지음 받은 사람들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같이’ 있을 수 있을까요? 같이 공동체를 이루고 공존할 뿐만 아니라, 같이 있는 것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같이’를 방해하는 요인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옳고 낫다고 생각하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입니다.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더 앞세우는 집단이기주의이며 자문화 중심주의입니다. 이것들은 연합을 방해하고 분열을 조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삼상 30장에는 다윗이 아말렉 족속을 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있던 다윗의 두 아내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자기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에 분노한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하는 매우 다급한 상황이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을 얻습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 물은 뒤 군사들을 이끌고 아말렉 족속을 추격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군사들이 이미 너무 지쳤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무 지친 군사 200명을 브솔 시내에 남겨두고 나머지 400명만 데리고 갑니다. 결국 아말렉 족속을 쳐서 포로로 잡혀갔던 가족들과 소유물들을 되찾아 왔고,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영웅으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부터는 공동체 가운데 갈등과 분열이 나타납니다. 다윗과 400명의 군사들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남겨졌던 200명의 사람들이 맞이하러 옵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사람들 중에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 내용이 22절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우리와 함께 전쟁터에 나서지 않은 괘씸한 자들이니 너희 처자들만 데리고 우리에게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의 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24절입니다.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다윗은 전쟁에 나갔던 400명이나, 나가지 못하고 브솔 시냇가에 머물렀던 200명이나 복을 ‘같이’ 누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까지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400명은 ‘자기들이 이룬 일’에 집중하면서 다른 200명의 사람들과 나누어 졌습니다(22절).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에 집중하면서 그들을 하나로 묶었습니다(23절). 우리가 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즉 복음 안에서 모든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 극복됩니다.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24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때문에 그들이 모든 것을 ‘같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오해해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노력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무조건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에 누가 전장에 나가려 하겠습니까? 아무도 일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핵심가치가 무엇인지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400명의 다수가 200명의 소수를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400명의 다수가 200명의 소수를 섬기고는 공동체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연장자가 어린 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공동체 안의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려 주면서 ‘같이’하는 공동체입니다. 더디더라도 함께하는 ‘더함’ 공동체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운명 공동체입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공동체가 바로 초대교회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나누며 마음을 ‘같이’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고 하는 표현이 사도행전에 3번이나 반복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행 5:12) 교회 공동체는 “마음을 같이”하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우리 안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공적 신앙이자 연대의식입니다. 우리가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 상관 없는 남이 아니라,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한 가족이며 형제자매라는 믿음입니다. ‘같이’의 가치가 우리 교회 안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그런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만 보고 나 혼자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걸어도 주변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소중한 만큼 다른 형제자매도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나만 기쁘고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같이 기뻐하고 함께 행복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만 아니라, 이 지역의 다른 교회도 함께 잘 되기를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우분투’(ubuntu)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유래된 말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I am because we are.)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영상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슬픈데, 어떻게 우리가 행복할 수 있어요?” 바로 이런 공동체의식, 연대의식이 우리 도시와, 나라와,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 가운데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안에 다른 지체가 슬퍼하는데 나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울산과 대한민국에 있는 다른 교회들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고 여러 문제로 힘들어하는데 우리 교회는 아무 문제없다고 행복해할 수 있나요? 세계에 흩어져 핍박받는 교회들이 여전히 많은데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우분투! 우리가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혼자가 아닌 ‘같이’ 있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갈등을 겪거나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보다는 따로, 함께 보다는 혼자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위해 우리를 한 공동체로, 한 가족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들이 ‘같이’ 지내는 것을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데 지난 목요일 밤에 카톡으로 한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주도 새생명훈련의 병행 프로그램인 부부세미나에 참석한 장요섭 성도님 부부의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보면서 바로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6)
혼자 지내면 편합니다. 따로 살면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는 ‘같이’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불편해도 ‘같이’ 지어져야 합니다. 저는 장요섭 성도님 부부의 모습 속에서 우리 교회의 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따로 교제하고, 한국어예배와 영어예배가 따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예배하고 ‘같이’ 봉사하고 ‘같이’ 교제하는 한 가족 공동체의 비전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시간은 주일 오전 11시이다."(The most segregated hour in America is 11 o'clock Sunday morning.) 주일오전예배 시간 조차 인종과 피부색의 차이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울산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적은, 인종과 문화, 언어를 넘어 가장 화합이 잘 이루어지는 시간이 주일 오전 11시, 바로 이곳 시티센터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즉 복음 안에서 하나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 삼으셔서 우리 모두의 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자신의 피로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우리를 한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가 ‘같이’ 있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연합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즉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같은 신앙고백 속에서 같이 지어져가는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Comments